김태훈 (잠실2동)
팝 칼럼니스트
공간은 기억을 담는다. 시간은 공간에 남아 낯설었던 곳을 의미있는 곳으로 만들고, 사소했던 에피소드들을 추억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래서 공간은 잊고 있던 기억들을 불러내 생물처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송파구 잠실에서 산 지 꽤 오래됐다. 엘스 아파트를 거쳐 현재 살고있는 리센츠까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이곳을 선택한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다. 어린시절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시절의 4학년이었던 1979년에 송파구 잠실 5단지로 이사 온 이후 신천초등학교, 신천중학교, 배명고등학교를 거쳐 젊은 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중간에 잠시 다른 동네를 배회(!)한 것을 제외하면 50년을 넘긴 인생의 2/3를 송파구에서 보낸 셈이다.
“
공간은 잊고 있던
기억들을 불러내
생물처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
물론 그때의 송파구와 지금의 송파구는 다르다. 나지막했던 잠실의 1~4단지는 이제 27층짜리 고층 아파트가 되어있다. 노점상이 늘어서 있던 새마을 시장의 도로들도 말끔하게 포장돼 있고, 신천역엔 잠실새내라는 다른 간판이 달려있다. 정승호 주연의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성룡의 쿵푸 영화를 동시 상영으로 보았던 호수극장은 사라진 지 오래다. 물론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남자 중학교였던 모교 신천중학교가 남녀 공학이 된 것이다. 그래도 장소를 옮긴 ‘돈까스의 집’은 40년의 시간을 견디며 여전히 맛있는 돈까스를 맛볼 수 있게 삼전동에서 영업 중이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포장마차의 우동을 즐겨 먹던 석촌호수엔 가끔 생소한 러버덕이 뜨기도 하지만 봄마다 벚꽃은 계절을 잊지 않고 그때와 똑같이 찾아온다.
‘송리단길’이라 명명된 호수의 뒷골목엔 맛집과 예쁜 카페들이 새로 등장했고, 방이동의 먹자골목에는 하루를 마친 샐러리맨들의 활기찬 분위기가 밤마다 넘쳐난다. 석촌호수에서 가락시장으로 이어지는 길가엔 도시 산책로의 역할을 할 가로정원마저 설계되고 있다. 변한 것이 많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새롭게 생겨나는 것도 많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그때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그때의 아이들 같은 자녀들을 키우며 이곳에서 살아간다.
송파구로 돌아온 것은 사실 우연이었다. 전세를 살고 있던 중랑구에서 계약만료 한 달 전에 재계약이 힘들다는 통보를 받았고, 당황한 나는 미팅이 있었던 잠실에서 일을 마친 후 무작정 부동산에 들어갔었다. TV에 출연하던 내 얼굴을 알아본 공인중개사에게 이사 갈 집을 찾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한 것이 다시 송파구로 돌아온 계기였다. 충동적이었지만 그것은 아마도 기억이 시킨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한동안 찾지 않았던, 송파구라는 옛 공간이 간직하고 있던 시간들이 마침내(!) 찾아온 나에게 슬며시 말을 걸어왔던 것이다.
‘그립지 않아? 어리고 젊었던 시절의 네가 뛰어놀던 이 곳이.’
퇴근길에 가끔은 한 두 정거장 전에 내려 아파트가 쭉 늘어선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 시간 동안 기억 속에 존재하는 옛 공간을 떠올려 잊고 있던 친구들에게 혼잣말을 하는 것이 내겐 가장 즐거운 일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보고싶다 친구들. 어디선가 모두들 다 잘 살고 있는 거지?’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
잡지사 에디터, 라디오 DJ, 방송평론가 등 남다르게 17개의 직업을 가진 만능엔터테이너다. 올해까지 2년 연속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맡고 있으며, 각종 지상파·종편 방송 출연 등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송파구에서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현재 잠실동에 거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