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가을, 독서의 계절을 염두에 두고 가려 뽑은 영화는 〈책도둑〉이다. 호주의 작가 마커스 주삭이 쓴 소설이 원작으로,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끝나는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음의 신이 소개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사신(死神)의 내레이션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특히 영화에서는 부감(俯瞰: 피사체를 180도 아래에 두고 위에서 촬영해 전지적 시점을 강조하는 카메라 기법)을 사용해 화자의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죽음의 신이 주목한 지점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의 작은 마을로 낮에는 나치, 밤에는 공습에 시달리는 곳이다. 공산주의자인 부모는 나치를 피해 한스에게 리젤을 맡기고 떠난다. 양아버지 한스는 아코디언을 연주해 얼어붙은 소녀의 마음을 열고 소녀가 몰래 훔쳐온 책의 글자를 가르쳐준다. 지하실 벽을 칠판으로 만들어 책에서 익힌 단어를 적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한다. 한편 홀로 코스트를 피해 한스를 찾아온 막스는 책을 매개로 리젤과 우정을 나눈다. 바깥 날씨를 알려주는 독특한 표현을 칭찬하고, ‘기억은 영혼의 기록’이며 ‘이야기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책에 쓰인 글자를 하얀색 페인트로 지워 리젤만의 이야기를 기록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한스와 막스의 도움으로 리젤은 자신만의 언어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완성해간다. 한스가 아코디언을 연주해 공습을 피해 대피소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공포를 잊게 한 것처럼 리젤은 이야기의 힘으로 이들의 불안을 덜어준다. 얼마 후 대대적 폭격이 있던 날, 죽음의 신은 리젤만 남겨두고 다른 이들의 영혼을 거두어간다. 홀로 살아남은 리젤은 잿더미 속에서 막스가 선물한 책을 끄집어내고 2년 후 그와 재회한다.
낡은 아코디언, 가족사진에 이어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머문 곳은 ‘막스가 리젤에게’라는 서명이 적힌 책이다. “그녀가 90년을 현명하게 살아낸 사실이 나를 즐겁게 한다.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준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영혼이었다”라는 목소리와 맞물린 배경음악은 〈죠스〉, 〈스타워즈〉, 〈쉰들러 리스트〉 등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존 윌리엄스의 작품이다. 단조와 장조를 오가는 피아노곡은 절망의 순간에도 책과 이야기 힘으로 자신을 지켜낸 리젤, 그녀에게 보내는 헌정곡처럼 들린다.
글 윤희윤
〈이 영화 함께 볼래?〉, 〈세상을 껴안는 영화읽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