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에 일제에 강제징집당한 김영관 독립지사는 천신만고 끝에 광복군에 입대해 태극기를 처음 보았다. 그는 그때 흘린 눈물을 지금도 기억한다. 광복군으로, 한국전쟁 참전 용사로, 또 육군종합학교 졸업생으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송파구 내 유일한 생존 독립유공자이다.
촬영 장소 용산전쟁기념관
“
태극기를 처음 본 순간
내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
경성사범학교 입학 5개월 만에 일제에 강제징집당했는데 어떻게 임시정부로 가게 되었나요?
아직도 1944년 9월 22일 빨간딱지(소집영장)가 날아온 날을 기억합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을 면제해주는 사범학교에 입학했건만 강제징집당했어요. 제가 1924년생이니까 징병 제1기였지요. 일본군 훈련소로 끌려가면서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렸어요. 소학교 때 선생님께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함흥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은 후 중국으로 이동했는데, 그때 탈출해서 임시정부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난생처음 간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찾아가기 쉽지 않았을 텐데 탈출기가 궁금합니다.
항저우 남서쪽 동양의 중대에서 달아날 기회를 노리다가 1944년 12월 3일 일요일 저녁 6시에 부대에서 만난 조선인 2명과 함께 탈출했습니다. 처음엔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려고 했지만, 멀어서 갈 수가 없었어요. 두 달 동안 100km를 걸어서 풍토병에 걸려 죽을 고비까지 넘긴 끝에 광복군 징모 제3분처 소속부대에 입대했습니다.
광복군 징모 제3분처 입대 후엔 어떤 임무를 수행하셨나요?
광복군은 연합군과 협동작전을 펼치는 데 참여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국내에 침투하기 위한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당시 광복군의 독립운동 활약상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지요. ‘조선을 독립국가로 승인한다’고 결의한 카이로선언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만일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요.
2015년에 직접 출간하신 〈광복군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어떤 책인가요?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사라지잖아요. 그래서 광복군에 관해 쓴 내 글과 광복군 명단, 백범 선생님이 남긴 글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이자 건국에 중추적 역할을 했기에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는 의미에서 〈광복군은 결코 죽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지었어요.
광복군은 국군의 뿌리라 할 수 있는데, 육사 명예 졸업 증서를 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감개무량했지요. 국군의 뿌리가 광복군임을 인정해주는 것이 고마웠습니다. 제가 조국에 돌아와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 육사의 전신인 육군종합학교에 들어가 26기로 졸업했는데요, 명예 졸업 증서를 받으며 육군사관학교를 두 번 졸업하는 기분이 들어 흐뭇했습니다.
송파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국가보훈 대상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려고 하는데요, 송파구의 노력에 대한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생존 애국지사의 집에 명패를 달아주는 등 송파구의 노력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통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독립운동에 대해 송파구 차원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송파쌤 인물도서로 활동하시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세요?
각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국가 발전에 보탬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 담론보다 주변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것을 바로잡는 행동이 쌓이면 부정부패 없는 사회를 만들 수 있어요. 이를테면 교통질서를 잘 지키는 것도 애국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