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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3·1절 특집 인터뷰]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미래는 역사의 펜으로 쓰인다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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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미래는 역사를 통해 예측할 수 있다.
100여 년 전, 자주 의식을 지닌 시민 행동의 집합이던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현재이자 나아가야 할 미래다.
송파구민이자 광복회 회원 라종일 교수에게 독립운동가 백봉 라용균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라종일 교수

대한민국 역사의 거대한 분수령
“3·1운동은 정치적으로 실패했다.” 가천대학교 라종일 석좌교수의 말이다. 지난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 되는 해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세계에 한국의 독립 의사를 밝혔다. 세계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다. 라종일 교수가 이를 ‘정치적 실패’로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결과적으로 3·1운동을 통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 더 큰 성과를 거뒀는데, 민족문화와 정치적·사상적 영역에서다.
일본이 식민 통치를 주장한 가장 큰 명분은 미개한 대한민국을 문명화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1운동에서 낭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보면 우리나라가 사상적으로 훨씬 앞섰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낡은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로 우리나라를 점령한 데 반해 기미 독립선언서에서는 평화주의·자주 민족 등 선진 근대 의식을 바탕으로 독립을 주장한다. 명분에 맞지 않게 일본과 우리나라의 도덕적 입장이 완전히 뒤집힌 것이다. 그 결과 강압으로는 우리 민족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은 지배 방식을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꾸기에 이른다. 대한민국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며 한국인의 이익을 위한다는, 이른바 문화 정치로 우리 민족은 비로소 우리말로 신문을 낼 수 있게 됐다. 비록 일본 입장에 반하는 글은 철저하게 검열하는 제한된 허가였지만, 한글 소설과 뉴스는 한글의 명맥을 잇고 국민이 민족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그 결과 국민은 처음으로 주체적 시민이 되어 자주독립을 외쳤으니 3·1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사상적·정치적 흐름이 바뀐 거대한 분수령인 셈이다. 그리고 3·1운동의 발판이 된 독립운동이 바로 2·8 독립선언이다.

2·8 독립선언을 이끈 조선청년독립단
▲ 2·8 독립선언을 이끈 조선청년독립단.

의지의 독립운동가, 부친 백봉 라용균
1919년 2월 8일, 600여 명의 한국 학생이 도쿄의 조선 YMCA회관에 모였다. 최필용, 운창석, 김도연, 이종근 등으로 구성된 조선청년독립단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 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이 일본 중심지에서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를 선포한 2·8 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서는 당시 일본 주재 각국 대사관과 일본 언론, 조선총독부 등에 전달됐다. 이 2·8 독립선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 백봉 라용균 선생이 라종일 교수의 부친이다.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한 라용균 선생
▲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으로 활동한 라용균 선생.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한 라용균 선생
▲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한 라용균 선생.

“선친이 독립운동에서 한 활동은 주로 자금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선친은 돌연 국내로 돌아와 조부께 돈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조부께서 어디에 쓸 것인지 묻자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하지요. 그러자 조부 역시 더 이상 묻지 않고 ‘돈이 어디에 있으니 알아서 꺼내 가라’고 답하셨고요. 이것이 2·8 독립선언 운동의 군자금이 되었지요.”
이 사건으로 라용균 선생은 2·8 독립선언의 주동자 중 한 명으로 투옥되고 재학 중이던 와세다 대학교에서도 쫓겨나 신변을 위협받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라용균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이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돕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소련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독립을 호소하는 등 굳은 의지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일본 유학 시절의 일화는 그의 강건한 성격을 나타낸다.
“제가 일본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선친의 와세다 대학교 학적부를 찾아본 적이 있습니다. 반에서 1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좋았더군요. 특히 시골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 유학을 갔음에도 일본어 성적이 A+라서 정말 놀랐습니다. 그래서 함께 공부하던 일본 학생들에게 미움을 사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지에서 이뤄낸 성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임을 받아들일 때 민족의 정체성은 더욱 견고하게, 그리고 더 넓게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어라
흔히 독립운동은 군사행동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송진우 선생은 동경 유학 당시 경술국치가 시작되자 라용균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독립운동이다.” 일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물리적 행위뿐 아니라 공부를 하거나 우리말로 책을 쓰고 돈을 버는 것까지 모두 독립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배움이 없으면 이길 수 없고, 민족 정체성을 잃으면 온전한 독립을 이루기 어렵다. 무엇보다 돈이 없으면 싸울 수 없다. 독립운동가 조만식 선생이 일본에 종속된 민족경제를 개선하기 위해 펼친 물산장려운동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라용균 선생은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근대화이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강조했다.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선친은 독립운동과 유학에 많은 돈을 썼다는 이유로 재산을 많이 물려받지는 못하셨죠. 대신 간척지 개혁으로 상당한 수익을 내신 것으로 압니다. 돌아가신 후에 안 사실인데, 일부 땅은 소작농에게 그냥 나누어주기도 하셨더군요. 나라가 보살피지 못하는 소작농은 지주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선친의 믿음이었습니다.”
라종일 교수는 일제강점기의 긍정적 영향으로 근대화를 꼽는 의견에 대해서는 무의미한 논란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는 외양에 불과하다. 생산성이 증대되거나 현대 시설을 갖추는 것은 근대화에 따라오는 성과이지 근대화 자체는 아니다. 근대화의 핵심 정신은 다름 아닌 자신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민족
라종일 교수는 부친 라용균 선생의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자식이다. 하지만 생전 라용균 선생과 라종일 교수의 성향은 많이 달랐다. 문학을 사랑하고 소설책을 즐겨 읽던 라종일 교수와 달리 라용균 선생은 자식이 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원했다.
“선친은 합리적이고, 자식에게 애정 표현을 살갑게 하시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저와는 의견이 다를 때가 많아 종종 논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저는 선친의 바람과는 다른 길을 걸었지만, 항상 나라를 먼저 생각하신 아버지의 발자취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자랑스러운 선친의 삶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아들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현재 라종일 교수는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백봉2·8장학금 등을 통해 부친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6·10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창립했다. 2·8 독립선언, 3·1운동, 6·10만세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모두 같은 맥락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라종일 교수의 설명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바로 민족문화를 보호하고 지키려는 자주정신이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민족입니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지요. 러시아, 중국, 미국, 일본 등 주변에 세계 강국이 포진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 정신을 더욱 고취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틀린 것이 아닌 다른 것임을 받아들일 때 민족의 정체성은 더욱 견고하게, 그리고 더 넓게 발전해나갈 것입니다.”

라종일 교수

라종일 교수는 주영 대사 및 주일 대사를 역임한 외교 안보 전문가다.
1995년, 국내 정치에 참여하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행정실장, 국가정보원 해외담당 차장, 대통령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가천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파소식 2020년 03월호
송파소식 2020년 03월호
  • 등록일 :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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