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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의 기억을 곱씹는 성숙한 역사의식, 삼전도비
2019-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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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촌호수 부근에 자리한 삼전도비에는 1636년 병자호란에서 패한 조선의 굴욕적인 역사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글 김정윤 사진 문덕관


굴종의 기억을 곱씹는 성숙한 역사의식, 삼전도비


 석촌호수 인근은 조선 시대까지 ‘삼전도’라 불린 나루터로, 잠실과 도성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잠실 롯데백화점에서 석촌호수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호수 초입에 커다란 비석 하나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병자호란에서 패한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삼전도의 굴욕’ 이후 세운 삼전도비가 바로 그것이다. 구민이라면 한 번쯤 들러서 살펴보면 좋을 귀한 송파구의 유물이다.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이끄는 12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다. 조선의 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산성을 우회한 그들은 불과 열흘 만에 개성에 당도했다. 숨 돌릴 틈 없이 청나라 군대가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도망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한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남한산성을 에둘러 12만 대군을 포진시킨 청 태종은 조선 왕의 항복을 요구했다.

 한겨울에 식량이 떨어져가는 산성 안에서 47일을 버틴 인조는 결국 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을 마주했다. 인조는 이곳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흙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영화 〈남한산성〉



온갖 수난 끝에 석촌호수에 자리한 삼전도비

온갖 수난 끝에 석촌호수에 자리한 삼전도비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의 스틸 컷.


 의 마지막 장면에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인조의 모습이 꽤나 상세하게 그려진다. 인조로 분한 박해일이 흙바닥에 이마를 대고 항복의 예를 갖추려 절을 올리는 장면에서 왕의 망건이 모래에 비벼지는 소리까지 생생하다.

 1637년 1월 30일 전쟁은 끝났고, 50만의 조선인이 청나라로 끌려갔다. 부제학 이경석이 비문을 짓고, 오준이 글씨를 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삼전도에 세웠다. 한강의 물길이 닿는 나루터였던 삼전도는 1950년대까지 나룻배가 다녔으나 1970년대에 한강을 개발한 이후 사라졌다. 비석은 원래 현재 석촌호수 서호 내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삼전도비라고 불리는 이 비석에 새긴 원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어리석은 조선 왕은 위대한 청국 황제에게 반항했다. 청국 황제는 어리석은 조선 왕을 타이르고, 자신의 대죄를 납득시켰다. 양심에 눈을 뜬 조선 왕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맹성하고, 위대한 청국 황제의 신하가 될 것을 맹세했다. 우리 조선은 이 청국 황제의 공덕을 영원히 잊지 않고, 또 청국에 반항하는 어리석은 죄를 반성하기 위해 이 석비를 세우기로 한다.”

 상당히 굴욕적인 내용으로, 이를테면 반성문 형식이다. 이런 치욕의 역사 때문인지 삼전도비는 이후에도 수많은 수난을 겪었다. 1895년 고종은 그 내용이 나라의 국격을 떨어뜨린다고 하여 삼전도비를 땅에 묻게 했으나 일제는 그것을 파내 1917년 다시 세웠다. 1956년에는 당시 문교부의 주도하에 다시 땅속에 묻히는 등 비석의 수난은 이어졌다. 이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난 후에야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고, 1963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석촌동 아름어린이공원 내에 다시 비석을 세웠으나 2007년 붉은 페인트로 훼손됐다. 2010년 원래 위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야 한다는 중론에 따라 현재의 자리인 석촌호수 서호로 옮기고 보호각을 설치했다.
송파소식 2019년 10월호
송파소식 2019년 10월호
  • 등록일 : 2019-09-24
  • 기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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