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인생학교’에서 경력에 공백이 생긴 여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여정민 매니저는 경력 보유 여성이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해 자존감을 되찾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여성이 엄마라서 망설이지 않고 다시 꿈꾸길 응원하며.
다시 찾은 꿈, 그림책 작가
소믈리에, 영업, 자동차 딜러. ‘송파인생학교’에서 맹활약 중인 여정민 매니저가 보유한 경력이다. 고등학교 시절 IMF 외환 위기로 인해 미술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호텔경영학과에 진학한 그녀는 특급 호텔 소믈리에를 거쳐 자동차 딜러로 일했다. 결혼 후에는 두 아이의 육아와 가사에 집중하느라 10년간 전업주부로 지냈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던 어느 날, 문득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엄마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는데….”
그러자 “청년 시절의 꿈이 진짜 꿈”이라는 말과 함께 잊고 지낸 일러스트레이터의 꿈이 떠올랐다. 20대에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현실과 타협한 게 아닐까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2018년 연남동에 자리한 SI그림책학교에 입학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시작한 그림 공부였지만, 물 만난 고기처럼 행복했다. 관련 책도 찾아서 읽고, 작가들의 강연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의 저자인 최혜진 작가의 강연에서 ‘경력 보유’ 여성이라는 표현을 알게 됐다. ‘경력 단절’이라는 위협적 단어를 ‘경력 보유’라는 긍정적 단어로 바꿔 여성이 잠재된 능력을 계발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준 표현이었다.
이후 여정민 매니저는 자기 연민이나 피해 의식은 내려놓고 스스로를 긍정하는 연습을 하며 그림 공부에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예술 활동을 통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2019년 송파문화재단의 마을활동가 기획자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경력 보유 여성이 강사로 나서서 원데이 클래스를 여는 ‘토요문화살롱’을 기획했다. 엄마의 일상 회복에서 한 단계 나아가 아빠의 일상 회복을 응원하는 ‘아빠는 목수다’ 프로그램(아빠가 직접 도마와 아이 책상을 만들어보는 목공 클래스)을 운영하기도 했다.
마을활동가에서 문화 예술 기획자로
마을활동가로 일하며 여성이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리하여 2020년 송파인생학교에서 코로나19로 집에만 있게 된 아이들을 챙기며 더 많은 책임을 떠맡은 ‘엄마’들을 위한 프로그램 ‘여성, 그림책을 만나다’를 기획했다.
초보가 왕초보를 가르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보다 깊이 있는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역량 있는 강사를 섭외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김승연 상담심리학 박사, 송미경 작가, 최혜진 작가를 강사로 섭외했고, 그림을 그려본 경험이 있는 8명의 여성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석 달간 참가자들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상담심리 수업을 통해 자신을 진단하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물’ 등 매주 다른 주제를 새로운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지난해 라운징북스에서 <코로나 블루, 여성의 일상회복을 그리다> 전시도 열었다. 기획자 입장에서 참가자들의 생각이 바뀌며 그림 또한 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보람찬 경험이었다. 송파문화재단의 전폭적 지원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올해는 그 후속 모임으로 그림책 북 클럽 ‘내 안의 새’를 진행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에 모여 그림책을 읽고 얘기를 나눈다. 나아가 8명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한다는 목표로 글을 쓰고 있다.
“20대에는 저에게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지금 기획자로서 일할 수 있는 경험을 쌓은 것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힘들게 버틴 시간이 다른 사람을 돕는 보석이 된다고 믿어요.”
이제 그녀에게는 출판사를 만들어 글 쓰는 여성과 그림 그리는 여성을 잇는 연결 고리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싶은 여성에게는 글 쓰는 기회를, 그림 그리는 작가에게는 책 표지를 장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다. 그때까지 그림책 출간 준비와 더불어 즐거운 일을 지속적으로 기획할 계획이다.